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스쿠 다 가마 (문단 편집) === 이후의 행적과 결과 === 피로 얼룩졌던 인도 원정 이후 바스쿠 다 가마는 20여년간 조용히 묻혀 지냈다. 왕실에 잘 보이려는 시도는 대부분 무산되었고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 같은 다른 제독들이 중용되었다. 그러다 1519년에 바스쿠 다 가마는 백작지위에 오르게 된다. 브라간사 공작과 협의하에 비디게이라라는 포르투갈 동남부의 마을을 봉지로 받게 된 것이다. 포르투갈 왕실 일원이 아니고서는 백작 자리에 오른 사례가 없는데 바스쿠 다 가마가 항해로 얻은 공적으로 최초로 백작 작위를 받게 되었다. 그 후 1521년이 되자 시운이 잘 풀려 바스쿠 다 가마가 다시 중용받게 된다. 1519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떠난 목적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포르투갈에 독점당한 인도, 아시아 방면에 스페인도 숟가락을 얹기 위한 것이었다. 포르투갈이 점유한 동쪽 항로 대신 인도로 향하는 서쪽 항로를 발견하고자 한 것. 포르투갈은 여기에 큰 위협을 느꼈고 마젤란을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바스쿠 다 가마는 이러다 인도 밥그릇 다 뺏기게 생겼다고 위기론을 주장한 바가 있었다. [[마누엘 1세]] 재위 후반기 시절에는 바스쿠 다 가마의 주장이 빛을 못 보았고 백작 작위를 받는 선에서 그쳤다. 그러나 마누엘 1세가 승하하고 [[주앙 3세]]가 즉위하면서 포르투갈이 다시 인도에 중점을 두게 된다. 그러면서 전설적인 성과를 낸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정책 고문으로 등용되는 등 다시 중용을 받게 된 것이다. 마침 당시의 인도 총독이었던 두아르트 드 메네제스가 무능력하다는 지적과 부패 혐의로 논란이 많았기도 했다. 결국 바스쿠 다 가마는 1524년 부왕 자격을 가지고 인도 총독에 부임하게 되었고 본인의 3차 인도 항해를 하였다. 인도 도착 후 전임 총독을 체포했고 부패를 일신하려 했으나 도중에 말라리아에 걸려서 [[코친]]에서 사망했다. 그 후 바스쿠 다 가마는 코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매장되었다가, 현재는 포르투갈 국립묘지(Panteão Nacional)로 이장되었다. 바스쿠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함으로서 베네치아인의 유럽내 향신료 무역 독점이 깨지게 되었다. 포르투갈 왕의 허풍[* 스스로를 '에티오피아,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의 정복, 항해, 그리고 교역의 왕(King of conquest, navigation, and commerce of Ethiopia, Arabia, Persia, and India)'으로 칭했다.(…) (<대항해시대>, 주경철 저, 22쪽)][* 다만 이런 허풍에 다른 유럽 나라들의 군주들은 "포르투갈 왕은 그저 잡화상 주인일 뿐이다."라고 비웃었다. 사실 포르투갈 본국은 16세기만 해도 인구가 고작 100만여 명에 불과했을 만큼 약소국이었고, 그래서 유럽 본토의 패권 다툼에는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머나먼 외부 세계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등으로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엄청 큰 사건으로 여겨졌지만, [[포르투갈]] 제국이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밀수]]가 횡행했고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베네치아 향신료 무역은 1550년경이면 다시 활발해졌다. 이 무역이 시들해진 건 후추보다 더 값이 나가는 [[육두구]]와 [[정향]] 산지를 유럽인들이 알아내 차지한 이후이고, 특히 [[네덜란드]]인들이 동인도 향신료 산지를 점령하고 나서부터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1차 항해의 여정은 동행한 기록원에 의해 '바스쿠 다가마의 첫 인도 여행기'라는 기록물로 남은 바가 있다. 4차 항해에 동행했던 서기 토메 로페스의 기록 역시 미리호 학살 같은 흑역사도 남김없이 서술하는 생생하고 치밀한 문장으로 인해 역사가들에게 즐겨 인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